이탈리아 왕국 (1805년~18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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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왕국은 1805년부터 1814년까지 존재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치하의 국가이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으며, 외젠 드 보아르네가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스식 행정 체제를 도입하여 24개의 데파르트망으로 구성되었으며, 군대를 조직하여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붕괴되었고, 그 영토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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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1805년~1814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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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이탈리아 왕국 |
현지 명칭 | "이탈리아어: Regno d'Italia" "프랑스어: Royaume d'Italie" |
존속 기간 | 1805년 - 1814년 |
수도 | 밀라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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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이탈리아 리라 |
공용어 |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
종교 | 가톨릭 교회 |
국가 | 보나파르트 황제를 위한 행진 |
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절대 군주제 |
국왕 | 1805년–1814년: 나폴레옹 1세 |
부왕 | 1805년–1814년: 외젠 드 보아르네 |
입법부 | 자문 원로원 |
역사 | |
주요 사건 | 1805년 3월 17일: 포고령 1805년 5월 23일: 나폴레옹 1세 대관식 1805년 12월 26일: 프레스부르크 조약 1814년 2월 8일: 민치오 강 전투 1814년 4월 11일: 퐁텐블로 조약 1814년 5월 30일: 파리 조약 |
선행 국가 | 프랑스 제1제국 이탈리아 공화국 베네치아 주 교황령 놀리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 |
후행 국가 | 오스트리아 제국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모데나-레조 공국 교황령 |
기타 정보 | |
통칭 | 이탈리아 |
지위 | 프랑스 제국의 괴뢰 국가 |
ISO 3166 코드 | 해당 없음 |
주민 | 이탈리아인 |
2. 역사
1805년 3월 18일,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고리치아와 베네토 현을 이탈리아 공화국에 넘겨주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 교황 비오 7세에게 대관식을 받고 원로원에서 프랑스 황제로 선언된 후,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어 1805년 5월 26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의 철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렀다.[1]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이탈리아 부왕으로 임명되었다.[1]
1809년에는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코토르 만이 왕국에서 제외되어 류블랴나를 주도로 하는 일리리아 지방으로 프랑스에 편입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면서 이탈리아 왕국도 붕괴했다. 1814년 4월 6일 나폴레옹의 퇴위가 공인되었고, 4월 16일 보아르네는 오스트리아와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4월 20일 밀라노에서 봉기가 일어나 재무장관 주세페 프리나가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보아르네는 주민들의 지지를 잃고 4월 26일 부왕직을 사임, 다음 날 바이에른 왕국으로 망명했다.
2. 1. 탄생
1805년 3월 18일,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고리치아와 베네토 현을 이탈리아 공화국에 넘겨주었고, 이탈리아 공화국은 '이탈리아 왕국'으로 바뀌게 되었다.[1]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대관식을 치르고 원로원에서 프랑스 황제로 선언되었다.[1] 이후 이탈리아 공화국도 이탈리아 왕국으로 바뀌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 겸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 1805년 5월 26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쓰고 즉위했다.[1] 나폴레옹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자신의 정치적 목적 추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이탈리아 부왕으로 임명되었다.[1]
2. 2. 헌법 및 제도
1805년 나폴레옹 1세가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쓰고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전의 이탈리아 공화국(나폴레옹) 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헌법 규약들을 통해 사실상 새로운 체제로 전환되었다.나폴레옹은 국가 원수로서 모든 권력을 가졌으며, 그의 부재 시에는 부왕인 외젠 드 보아르네가 대리했다. 1806년에는 보아르네가 왕위 계승자로 지정되었다.[2]
왕국의 주요 통치 기구는 다음과 같았다.
- 국무원: 콩술타, 입법 위원회, 의장을 통합한 기구였으나, 그 의견은 국왕에게 구속력이 없었다.
- 상원: 1808년에 콩술타에서 분리되어 국왕에게 중요한 신하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2]
- 입법부: 이론적으로는 존재했지만 1805년 이후 소집되지 않았다.
1804년 3월 21일에는 나폴레옹 법전이 도입되었다.[3] 1812년에는 회계 법원이 신설되었다.
1808년에는 공작, 백작, 남작으로 구성된 새로운 귀족 제도가 만들어졌다.[2]
정부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행정 부서와 장관들이 있었다.
부서 | 장관 |
---|---|
전쟁부 장관 | 오귀스토 카페렐리, 주세페 단나, 아킬레 폰타넬리 |
내무부 장관 | 루도비코 아르보리오 디 브레메, 루이지 바카리 |
외무부 장관 | 페르디난도 마르스칼키 |
법무부 장관 겸 대법관 | 주세페 루오시 |
재무부 장관 | 안토니오 베네리, 암브로조 비라고 |
재정부 장관 | 주세페 프리나 |
종교부 장관 | 조반니 보바라 |
2. 3. 영토 변화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는 여러 조약과 사건을 통해 변화를 겪었다.- 1806년 5월 1일,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결과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베네치아 영토의 동부와 나머지 지역을 획득했다. 여기에는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가 코토르까지 포함되었다. 다만, 마사-카라라 현은 엘리사 보나파르트의 루카 및 피옴비노 공국으로 넘어갔고, 과스탈라 공국은 5월 24일에 왕국에 병합되었다.[4]
- 1807년 10월 10일, 오스트리아와의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는 몬팔코네를 오스트리아에 양도하고 그라디스카를 획득하여, 새로운 국경선을 이손초 강으로 정했다.[4]
- 1808년 봄, 오귀스트 드 마르몽 장군에 의해 정복된 라구사 공화국이 왕국에 병합되었다.
- 1808년 4월 2일, 교황령 해체에 따라 현재의 마르케주가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 시기에 왕국은 최대 영토를 확보하여 670만 명의 인구와 2,155개의 코무네(지방 자치 단체)로 구성되었다.[4]
- 1810년 2월 28일,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 나폴레옹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왕은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 교환을 결정했다. 바이에른 왕국은 남부 티롤 백국을 이탈리아 왕국에 양도했고, 이탈리아 왕국은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라구사 포함)를 프랑스에 양도하여 아드리아해 영토를 새로 창설된 프랑스 일리리아 주에 편입시켰다.[4]
- 1811년 8월 5일에는 가르파냐나와 프리울리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간의 국경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최대 확장 시기(1809년~1814년) 동안 이탈리아 왕국은 이스트리아/달마티아를 잃었지만 볼차노/알토 아디제가 추가되었고 24개의 데파르트망으로 구성되었다.[21]
2. 4. 통화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리라라는 새로운 국가 통화를 도입하여, 기존에 이탈리아에서 통용되던 지역 통화들을 대체했다. 이탈리아 리라는 프랑스 프랑과 크기, 무게, 금속이 동일했다.[5] 1806년 3월 21일, 나폴레옹의 제국 칙령에 따라 주조가 결정되었으며, 새로운 주화 생산은 1807년에 시작되었다. 화폐 단위는 무게가 5 그램인 은 리라였다.
리라는 기본적으로 100 센트로 분할되었으며, 전통에 따라 20 솔디로도 분할되었다.
종류 | 구성 | 비고 |
---|---|---|
센트 | ||
솔디 | ||
리라 |
2. 5. 군대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는 대(大)육군에 편입되어 나폴레옹 전쟁의 모든 전투에 참전했다.[6][7] 1805년부터 1814년까지 존속하는 동안 ''이탈리아 왕국''은 나폴레옹 1세에게 약 20만 명의 병사를 제공했다.1805년 이탈리아군은 영국 해협에 주둔했고, 1806년부터 1807년까지 콜베르크와 단치히 포위전에 참전했으며 달마티아에서 싸웠다.[10]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이탈리아 사단 전체는 스페인에서 복무했으며, 특히 쉬셰 휘하에서 타라고나와 사군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8][9]
1809년, 외젠의 ''이탈리아 군''은 나폴레옹 1세의 오스트리아 제국 침공의 우익을 형성하여 라브에서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고, 바그람의 승리에도 기여했다.[10][11]
1812년, 외젠 드 보아르네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 27,000명을 이끌고 러시아 제국으로 진격했다.[12] 이탈리아 병력은 보로디노와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13][14] "''이탈리아군은 유럽에서 가장 용감한 부대 중 하나로 꼽힐 자격이 있는 자질을 보여주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15]
러시아 원정에서 1,000~2,000명의 이탈리아인만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기치를 지켜내며 귀환했다.[12][16] 1813년, 외젠 드 보아르네는 오스트리아군의 맹공에 가능한 한 오래 저항했고,[13] ''(민치오 강 전투)'' 이후 1814년 2월 휴전 협정에 서명해야 했다.[17]



이탈리아 왕국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보병:'''
- 정규 보병: 이탈리아 공화국 출신의 5개 연대와, 1805년과 1808년에 각각 추가로 창설된 2개 연대.
- 경보병: 이탈리아 공화국 출신의 3개 연대와, 1811년에 추가로 창설된 1개 연대.
- 왕실 근위대: 이탈리아 공화국 출신 2개 대대 (''척탄병'' 및 ''사냥꾼''), 1806년에 추가로 창설된 2개 대대 (''벨리테스''), 1810년에 창설된 젊은 근위대 2개 대대, 1811년에 추가로 창설된 2개 대대.
'''기병:'''
- 용기병: 이탈리아 공화국 출신의 2개 연대.
- ''카차토레 아 카발로'' (경기병): 이탈리아 공화국 출신의 1개 연대와, 1808년, 1810년, 1811년에 각각 추가로 창설된 3개 연대.
- 왕실 근위대: 용기병 2개 기병대, 명예 근위대 5개 중대.[18]
2. 6. 지방 행정
이탈리아 왕국의 지방 행정 체계는 프랑스식 데파르트망 제도를 따랐다. 1805년 6월 8일 법률에 의해 처음 수립되었으며, 국가는 14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나뉘었다. 이는 공화국 시대의 12개 데파르트망에 아다(손드리오)와 아디제(베로나)를 추가한 것이다.각 데파르트망의 수장은 일반 평의회였다.
데파르트망은 다시 프랑스의 아롱디스망에 해당하는 구로 나뉘었다. 각 구의 수장은 부 프레페였으며, 프레페와 유사한 권한을 가졌지만 더 작은 지역을 관할했다. 지방 입법 기관은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구 평의회였다. 구는 다시 세금 징수관과 치안 판사가 있는 캉통으로 나뉘었다.
캉통은 다시 코뮌으로 나뉘었다. 코뮌은 국왕 또는 프레페가 코뮌 규모에 따라 선출한 15명, 30명 또는 4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시 의회(''Consiglio Comunale'')를 가졌다. 의회는 일반 행정을 위해 시 서기의 도움을 받아 2명, 4명 또는 6명의 원로를 선출했다. 가장 큰 코뮌의 수장은 왕립 ''포데스타''였으며, 더 작은 코뮌에는 프레페가 임명한 시장이 있었다. 모든 시 공직은 소유주와 상인만이 맡을 수 있었으며, 소유주의 리더십이 보장되었다.
왕국 존속 기간 동안 국내 및 국제적인 이유로 국가의 행정 시스템은 변경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패배와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나폴레옹은 1806년 3월 30일에 발표되고 5월 1일에 비준된 옛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를 이탈리아에 병합했다. 베네치아 본토에 6개, 이스트리아(카포디스트리아)에 1개 등 7개의 새로운 데파르트망이 만들어졌으며, 달마티아는 총 관리인 단돌로 씨가 이끄는 특별 기관을 받아 자체 법률을 유지했다. 1807년 7월 14일, 정부는 코뮌의 수를 줄이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교황령의 해체에 따라, 왕국은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확장되었고, 1808년 4월 20일, 3개의 새로운 데파르트망이 설립되었다. 최종적인 영토 변경은 1810년 6월 10일에 이루어졌으며, 나폴레옹이 앞서 5월 28일에 발표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는 이스트리아와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달마티아를 잃고, 보상으로 볼차노 시까지의 모든 남부 티롤을 얻어, 24번째이자 마지막 데파르트망인 오트 아디제를 만들었다.[19]
최대 확장 시기(1809년~1814년) 동안 이탈리아 왕국은 이스트리아/달마티아를 잃었지만 볼차노/알토 아디제가 추가되었고 24개의 데파르트망으로 구성되었다.[21]
데파르트망 | 수도 | 구(District) |
---|---|---|
Dipartimento dell'Adda (1805)|아다it | 손드리오 | 없음 |
Dipartimento dell'Adige|아디제it | 베로나 | |
Dipartimento dell'Agogna|아고냐it | 노바라 | 노바라 구, 비제바노 구, 도모도솔라 구, 바랄로 구, 아로나 구 |
알토 아디제 | 트렌토 | |
Dipartimento del Crostolo|크로스톨로it | 레조 에밀리아 | |
Dipartimento del Lario (1801)|라리오it | 코모 | 코모 구, 바레세 구, 메나조 구, 레코 구 |
Dipartimento del Basso Po|바소 포it | 페라라 | |
Dipartimento del Mella|멜라it | 브레시아 | 브레시아 구, 키아리 구, 베롤라누오바 구, 살로 구 |
Dipartimento del Mincio|민초it | 만토바 | 만토바 구, 레베레 구, 카스틸리오네 구 |
Dipartimento d'Olona|올로나it | 밀라노 | 밀라노 구, 파비아 구, 몬차 구, 갈라라테 구 |
Dipartimento del Panaro|파나로it | 모데나 | |
Dipartimento del Reno|레노it | 볼로냐 | |
Dipartimento del Rubicone|루비코네it | 체세나 | |
Dipartimento del Serio|세리오it | 베르가모 | 베르가모 구, 트레빌리오 구, 클루소네 구, 브레노 구 |
Dipartimento dell'Alto Po|알토 포it | 크레모나 | 크레모나 구, 크레마 구, 로디 구, 카살마조레 구 |
Dipartimento dell'Adriatico|아드리아티코it | 베네치아 | |
Dipartimento del Bacchiglione|바키글리오네it | 비첸차 | |
Dipartimento del Brenta|브렌타it | 파도바 | |
Dipartimento dell'Istria|이스트리아it | ||
Dipartimento di Passariano|파사리아노it | 우디네 | |
Dipartimento della Piave|피아베it | 벨루노 | |
Dipartimento del Tagliamento|탈리아멘토it | 트레비소 | |
Dipartimento del Metauro|메타우로it | 안코나 | |
Dipartimento del Musone|무소네it | 마체라타 | |
Dipartimento del Tronto|트론토it | 페르모 |
2. 7. 언어와 교육
이탈리아어는 이탈리아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언어였다. 프랑스어는 의례와 프랑스와의 모든 관계에서 사용되었다.[20]교육은 모든 어린이에게 보편화되었으며,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다. 총독 빈첸초 단돌로의 칙령에 따라, 지역 인구가 더 다양했던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20]
2. 8. 멸망

1814년 4월 11일, 나폴레옹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왕좌에서 모두 퇴위하자, 외젠 드 보아르네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대와 함께 민치오 강에 진을 치고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4월 17일에 소집된 이탈리아 왕국 상원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4월 20일, 밀라노에서 봉기가 일어나 부왕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봉기로 재무 장관 주세페 프리나 백작이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선거인들은 상원을 해산하고 오스트리아군에 도시 보호를 요청하는 한편, 카를로 베리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 섭정 정부"를 임명했다.[1]
외젠은 4월 23일에 항복하고 바이에른으로 추방되었으며, 4월 28일 오스트리아군이 밀라노를 점령했다. 4월 26일, 제국은 아니발레 소마리바를 롬바르디아의 "제국 위원"으로 임명했고, 임시 섭정은 많은 세금을 폐지하거나 감면했다. 5월 25일, 최고 제국 위원 하인리히 폰 벨레가르데 백작이 롬바르디아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으며, 모데나, 로마냐, 피에몬테의 이전 군주국들이 점차 재건되었다.[1]
5월 30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어 왕국의 잔존 영토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병합되었으며, 이는 6월 12일 벨레가르데 백작에 의해 발표되었다.[1]
3. 주요 인물
이탈리아 왕국의 주요 인물로는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의붓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 그리고 여러 장관들이 있었다. 나폴레옹 1세는 프랑스 황제이자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왕국의 통치자였고, 외젠 드 보아르네는 부왕으로서 나폴레옹 1세를 대리했다.
왕국의 정부는 7명의 장관으로 구성되었다.
부처 | 장관 |
---|---|
전쟁부 장관 | 오귀스토 카페렐리, 주세페 단나, 아킬레 폰타넬리 |
내무부 장관 | 루도비코 아르보리오 디 브레메, 루이지 바카리 |
외무부 장관 | 페르디난도 마르스칼키 |
법무부 장관 겸 대법관 | 주세페 루오시 |
재무부 장관 | 안토니오 베네리, 암브로조 비라고 |
재정부 장관 | 주세페 프리나 |
종교부 장관 | 조반니 보바라 |
주세페 프리나는 1814년 밀라노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다.
3. 1. 나폴레옹 1세
Empereur des Français et Roi d'Italie|프랑스 황제이자 이탈리아 국왕프랑스어
Imperatore dei Francesi e Re d'Italia|프랑스 황제이자 이탈리아 국왕it
이탈리아 왕국은 1805년 3월 17일에 탄생했는데, 당시 이탈리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하고 그의 의붓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가 부왕이 되었다.[1] 나폴레옹 1세는 1805년 5월 23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쓰고 즉위했다.[1] 그의 칭호는 "프랑스 황제이자 이탈리아 국왕"이었으며, 이는 이탈리아 왕국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1]
공화국 헌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았지만, 여러 헌법 규약에 의해 사실상 변경되었다. 첫 번째 규약은 왕국 탄생 이틀 후인 3월 19일에 선포되었는데,[2] 나폴레옹 1세를 국왕으로 선포하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 그의 친아들이나 입양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왕위는 분리되어 유지되도록 했다. 3월 29일에 제정된 두 번째 규약은 섭정, 왕국의 대관, 그리고 선서를 규정했다.
6월 5일에 선포된 세 번째 규약은 왕국의 실제 헌법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 1세는 국가 원수로서 정부의 모든 권한을 가졌다. 그가 없을 때는 부왕인 외젠 드 보아르네가 그를 대신했다. 콩술타, 입법 위원회, 의장은 모두 국무원으로 통합되었고, 이들의 의견은 국왕에게 참고 사항일 뿐 강제성은 없었다. 기존 의회인 입법부는 이론적으로는 유지되었지만, 1805년 이후에는 소집되지 않았다. 나폴레옹 법전은 1804년 3월 21일에 도입되었다.[3]
1806년 2월 16일에 결정된 네 번째 규약은 보아르네를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다.[2]
1808년 3월 21일에 제정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규약은 콩술타를 국무원에서 분리하고 상원으로 개칭하여 국왕에게 중요한 신하들의 의견을 알리는 역할을 부여했다.[2]
9월 21일의 일곱 번째 규약은 공작, 백작, 남작으로 구성된 새로운 귀족 제도를 만들었다. 1810년 3월 15일의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규약은 왕족 구성원들에게 연금을 제정했다.[2] 1812년에는 회계 법원이 신설되었다.
정부에는 7명의 장관이 있었다.
부처 | 장관 |
---|---|
전쟁부 장관 | 처음에는 오귀스토 카페렐리, 이후 주세페 단나, 1811년부터 아킬레 폰타넬리 |
내무부 장관 | 처음에는 루도비코 아르보리오 디 브레메, 1809년부터 루이지 바카리 |
외무부 장관 | 페르디난도 마르스칼키 |
법무부 장관 겸 대법관 | 주세페 루오시 |
재무부 장관 | 안토니오 베네리, 1811년부터 암브로조 비라고 |
재정부 장관 | 주세페 프리나 |
종교부 장관 | 조반니 보바라 |
3. 2. 외젠 드 보아르네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아들로, 1805년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자 24세의 나이로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1] 나폴레옹 1세는 밀라노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쓰고 이탈리아 국왕에 즉위했으며, "프랑스 황제이자 이탈리아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나폴레옹 1세가 국가 원수로서 정부의 전권을 가졌고, 그가 부재 시에는 외젠 드 보아르네가 그를 대리했다. 1806년 2월 16일에 결정된 네 번째 규약은 보아르네를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다.[2]
나폴레옹이 1814년 4월 11일 프랑스와 이탈리아 왕좌에서 모두 퇴위했을 때, 외젠 드 보아르네는 민치오 강에 군대를 배치하고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1814년 4월 20일, 밀라노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재무 장관 주세페 프리나가 살해되고, 이탈리아 왕국 상원은 해산되었다. 외젠은 4월 23일에 항복하고 바이에른으로 추방되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의해 점령되었다.[3]
3. 3. 주세페 프리나
1814년 4월 20일, 밀라노에서 일어난 봉기 때 군중이 재무 장관 주세페 프리나 백작을 살해했다.[1] 이 사건은 이탈리아 왕국의 실질적인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대선거인들은 상원을 해산하고 오스트리아군에 도시 보호를 요청했으며, 카를로 베리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 섭정 정부"가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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